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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o Cairo: THERE ARE NO SCRAPS OF MEN

조회 수 1223 추천 수 0 2014.01.22 21:40:47

I've been in Afghanistan for 21 years.

I work for the Red Cross and I'm a physical therapist.

My job is to make arms and legs -- well it's not completely true. We do more than that.

We provide the patients, the Afghan disabled, first with the physical rehabilitation

then with the social reintegration. It's a very logical plan, but it was not always like this. For many years, we were just providing them with artificial limbs.

It took quite many years for the program to become what it is now.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1년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적십자에서 일하고 있으며 물리 치료사입니다.

저의 일은 팔과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일을 합니다.

우리는 환자들인 아프가니스탄의 장애우들에게 먼저는 물리적 재활을 하도록 돕고

다음에는 사회적 적응을 하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꽤 논리적인 계획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수년간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의족, 의수를 제공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오늘과 같이 되는데는 몇년이 걸렸습니다.

 

Today, I would like to tell you a story, the story of a big change,

and the story of the people who made this change possible.

I arrived in Afghanistan in 1990 to work in a hospital for war victims.

And then, not only for war victims, but it was for any kind of patient.

I was also working in the orthopedic center, we call it.

This is the place where we make the legs.

At that time I found myself in a strange situation. I felt not quite ready for that job.

There was so much to learn. There were so many things new to me.

But it was a terrific job. But as soon as the fighting intensified,

the physical rehabilitation was suspended. There were many other things to do.

So the orthopedic center was closed because physical rehabilitation was not considered a priority. It was a strange sensation. Anyway, you know every time I make this speech -- it's not the first time -- but it's an emotion. It's something that comes out from the past. It's 21 years, but they are still all there.

 

어쨌든 1992년 무자헤딘(이슬람 성전의 전사)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정형외과 센터는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노숙자들과 강제 이주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슬람 사원에서 대규모 식료품 배급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곳 사원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끔찍한 상황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잊고 싶고, 보고 싶지 않을때면

그냥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고 싶어지고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폭탄은 저의 차에서 멀지않은 곳에 떨어졌습니다. 글쎄요, 충분히 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굉음을 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거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차들 또한 사라졌습니다. 저는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 길 한가운데 남겨져 있었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었는데 결사적으로 움직이려하고 있었습니다.

 

Anyway, in 1992, the Mujahideen took all Afghanistan.

And the orthopedic center was closed. I was assigned to work for the homeless,

for the internally displaced people. But one day, something happened.

I was coming back from a big food distribution in a mosque where tens

and tens of people were squatting in terrible conditions. I wanted to go home.

I was driving. You know, when you want to forget, you don't want to see things,

so you just want to go to your room, to lock yourself inside and say,

"That's enough." A bomb fell not far from my car -- well, far enough, but big noise.

And everybody disappeared from the street. The cars disappeared as well. I ducked.

And only one figure remained in the middle of the road.

It was a man in a wheelchair desperately trying to move away.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커다란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에 1990년에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전쟁 희생자들만이아니라 다른 종류들의 환자들도 보았습니다.

저는 또한 우리가 정형외과 센터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일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다리를 만드는 곳입니다.

그 당시 저는 이상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일에 그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울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많은 것들이 새로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깊어지면서 물리적 재활은 중단되었습니다. 다른 할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 센터는 문을 닫았습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재활은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매번 하게 될때마다, 어떤 감정이 밀려옵니다.

이런 감정이 이번 처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오는 그런 것입니다.

21년이 지났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저의 가슴에 있습니다.

 

Well I'm not a particularly brave person, I have to confess it,

but I could not just ignore him. So I stopped the car and I went to help.

The man was without legs and only with one arm.

Behind him there was a child, his son, red in the face in an effort to push the father.

So I took him into a safe place. And I ask,

"What are you doing out in the street in this situation?"

"I work," he said. I wondered, what work? And then I ask an even more stupid question: "Why don't you have the prostheses? Why don't you have the artificial legs?" And he said, "The Red Cross has closed." Well without thinking, I told him

"Come tomorrow. We will provide you with a pair of legs."

The man, his name was Mahmoud, and the child, whose name was Rafi, left.

And then I said, "Oh, my God. What did I say? The center is closed, no staff around.

Maybe the machinery is broken. Who is going to make the legs for him?"

So I hoped that he would not come. This is the streets of Kabul in those days.

So I said, "Well I will give him some money."

 

고백하자면 저는 특별히 용감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을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를 세우고 도우러 갔습니다. 두 다리가 없는 그 사람은 팔도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 사람 뒤에는 그의 아들인 한 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려고 애쓴 나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길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는 말했습니다."일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의족을 안하고 계십니까? 왜 인공 다리을 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적십자는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오세요. 우리가 당신에게 의족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 Mahmoud와 그의 아들, Rafi는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맙소사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센터는 문을 닫았고 아무 직원도 없어.

아마도 기계도 고장났을거야. 누가 그에게 다리를 만들어 준단 말이야?" 그래서 저는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이 곳은 그 당시의 카불 거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그냥 그에게 돈이나 좀 줘야지."

 

And so the following day, I went to the orthopedic center. And I spoke with a gatekeeper.

I was ready to tell him, "Listen, if someone such-and-such comes tomorrow,

please tell him that it was a mistake. Nothing can be done. Give him some money."

But Mahmoud and his son were already there. And they were not alone.

There were 15, maybe 20, people like him waiting. And there was some staff too.

Among them there was my right-hand man, Najmuddin. And the gatekeeper told me,

"They come everyday to see if the center will open." I said,

"No. We have to go away. We cannot stay here." They were bombing

-- not very close -- but you could hear the noise of the bombs.

 So, "We cannot stay here, it's dangerous. It's not a priority."

But Najmuddin told me, "Listen now, we're here."

At least we can start repairing the prostheses, the broken prostheses of the people

and maybe try to do something for people like Mahmoud." I said,

"No, please. We cannot do that. It's really dangerous. We have other things to do."

But they insisted. When you have 20 people in front of you,

looking at you and you are the one who has to decide ...

 

그리고 다음 날, 저는 정형외과 센터에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위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저기요, 만일 이러저러 한사람이 내일 오면 그

에게 실수였다고 말해주세요. 아무것도 할수 없거든요. 그에게 돈을 얼마 줘서 보내세요."

그러나 Mahmoud와 그의 아들은 이미 와있었습니다. 그런에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15내지 20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도 몇명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저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Najmuddin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수위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센터가 열었는지 보려고 매일 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안돼요, 우리는 여기서 나가야해요. 우리는 여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폭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센터는 우선사항이 아닙니다."

그러나 Najmuddin 은 말했습니다."보세요, 우리가 이 센터에 있잖아요.

적어도 우리는 사람들의 망가진 의족을 고치는 것을 시작할수는 있을 거에요.

 그리고 Mahmoud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아마도 무언가를 해볼 수 있을거예요."

저는 말했습니다."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정말 위험해요.

우리는 다른 할 일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집요했습니다.

20명의 사람들이 앞에 서서 여러분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여러분이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요?

 

So we started doing some repairs. Also one of the physical therapists reported

that Mahmoud could be provided with a leg, but not immediately.

The legs were swollen and the knees were stiff, so he needed a long preparation.

Believe me, I was worried because I was breaking the rules.

I was doing something that I was not supposed to do.

In the evening, I went to speak with the bosses at the headquarters, and I told them

-- I lied -- I told them, "Listen, we are going to start a couple of hours per day,

just a few repairs." Maybe some of them are here now.

 

(Laughter)

 

그래서 우리는 일단 수리 작업을 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리 치료사들중의 한 명은

 Mahmoud가 당장은 아니지만 의족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다리들은 부어 있었고 무릎은 굳어 있어서 Mahmoud는 오랜 기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정말 말이죠, 저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규칙을 어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저녁에 제가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본부의 상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저기요. 우리가 하루에 몇시간 정도만 일을 시작할까하는데요 수선 몇가지만 하려고 해요." 아마도 수선할 것들 중 몇개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웃음)

 

So we started. I was working, I was going everyday to work for the homeless.

And Najmuddin was staying there, doing everything and reporting on the patients.

He was telling me, "Patients are coming."

We knew that many more patients could not come, prevented by the fighting.

But people were coming. And Mahmoud was coming every day.

And slowly, slowly week after week his legs were improving.

The stump or cast prosthesis was made,

and he was starting the real physical rehabilitation.

He was coming every day, crossing the front line. A couple of times I crossed the front line in the very place where Mahmoud and his son were crossing.

I tell you, it was something so sinister that I was astonished he could do it every day.

 

그래서 우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노숙자들을 위해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Najmuddin은 센터에 머물러 있으면서 모든 일을 하고 환자들에대해 보고를 했습니다.

Najmuddin은 말했습니다."환자들이 오고 있어요." 더 많은 환자들이 전투때문에 올 수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왔습니다. 그리고 Mahmoud는 매일 왔습니다.

그리고 쳔천히, 천천히, 몇주가 지나자 그의 다리는 나아졌습니다.

절단 부위나 의족의 석고모형이 만들어졌고 그는 진짜 물리 재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전선을 건너 센터에 왔습니다.

한 두어번 저는 Mahmoud와 그의 아들이 건넜던 바로 그 전선을 건넜습니다.

그것은 매우 험악한 그런 일이라 그가 매일 건널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But finally, the great day arrived. Mahmoud was going to be discharged with his new legs. It was April, I remember, a very beautiful day.

April in Kabul is beautiful, full of roses, full of flowers.

We could not possibly stay indoors, with all these sandbags at the windows.

Very sad, dark. So we chose a small spot in the garden.

And Mahmoud put on his prostheses, the other patients did the same,

and they started practicing for the last time before being discharged.

 

그러나 마침내, 그 날이 왔습니다. Mahmoud는 그의 새로은 다리를 갖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에 그날은 사월의 아주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사월의 카불은 아릅답습니다.

장미가 만개하고 꽃들이 활짝 핍니다. 우리는 창문에 모래 주머니로 막아둔 이 실내에 도저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실내는 매우 어둡고 우울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정원의 한 군데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Mahmoud는 그의 의족을 찼고 다른 환자들도 그렇게 해서

그들은 퇴원하기 전 마지막으로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Suddenly, they started fighting. Two groups of Mujahideen started fighting.

We could hear in the air the bullets passing. So we dashed, all of us, towards the shelter. Mahmoud grabbed his son, I grabbed someone else. Everybody was grabbing something. And we ran. You know, 50 meters can be a long distance if you are totally exposed,

but we managed to reach the shelter. Inside, all of us panting,

I sat a moment and I heard Rafi telling his father,

"Father, you can run faster than me." (Laughter) And Mahmoud,

"Of course I can. I can run, and now you can go to school.

No need of staying with me all the day pushing my wheelchair."

Later on, we took them home. And I will never forget Mahmoud

and his son walking together pushing the empty wheelchair. And then I understood, physical rehabilitation is a priority. Dignity cannot wait for better times.

 

갑자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자헤딘의 두 그룹이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공중에서 총알들이 날아다니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피난처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Mahmoud는 아들을 데리고 갔고 저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잡고 뛰었습니다. 우리는 뛰었습니다. 50미터는 긴 거리일 수 있습니다. 만일 완전히 전투에 노출되어 있다면은요.

그러나 우리는 피난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오자, 우리는 모두 헐떡였습니다.

저는 앉는 순간 Rafi가 아빠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빠, 저보다 빨리 뛰시던에요."

(웃음) 그리고 Mahmoud는 말했습니다."물론이지. 나는 뛸 수 있어 그리고 너는 이제 학교에 갈 수 있어.

하루 종일 내 곁에서 휠체어를 밀어줄 필요가 없어." 후에 우리는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Mahmoud와 그의 아들이 텅빈 휠체어를 밀며 함께 걷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저는 깨달았습니다. 물리 재활은 최우선이구나. 인간 존엄은 더 나은 때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From that day on, we never closed a single day.

Well sometimes we were suspended for a few hours,

but we never, we never closed it again. I met Mahmoud one year later.

He was in good shape -- a bit thinner. He needed to change his prostheses --

a new pair of prostheses. I asked about his son.

He told me, "He's at school. He'd doing quite well."

But I understood he wanted to tell me something.

So I asked him, "What is that?" He was sweating. He was clearly embarrassed.

And he was standing in front of me, his head down. He said,

"You have taught me to walk. Thank you very much.

Now help me not to be a beggar anymore." That was the job.

"My children are growing. I feel ashamed.

I don't want them to be teased at school by the other students."

I said, "Okay." I thought, how much money do I have in my pocket?

Just to give him some money. It was the easiest way.

He read my mind, and he said, "I ask for a job."

And then he added something I will never forget for the rest of my life.

He said, "I am a scrap of a man, but if you help me, I'm ready to do anything,

even if I have to crawl on the ground." And then he sat down.

I sat down too with goosebumps everywhere.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하루도 문을 닫은 날이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몇시간 정도 문을 닫은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시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년 후에 Mahmoud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는 아주 좋아보였습니다. 약간 말라보이기는 해도요. 그는 그의 의족와 의수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했습니다.

저는 그의 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들은 학교에 있습니다. 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부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제 앞에 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걷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더이상 거지로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저의 아이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수치심을 느낍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말했습니다."알았습니다." 저는 제 주머니에 얼마나 돈이 있는 지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냥 얼마간의 돈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으니까요.

그는 저의 생각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직장을 갖고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말을 덧붙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저는 인간 쓰레기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비록 제가 땅을 기어 다녀야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 채 저도 자리에 앉았습니다.

 

Legless, with only one arm, illiterate, unskilled -- what job for him? Najmuddin told me, "Well we have a vacancy in the carpentry shop."

"What?" I said, "Stop." "Well yes, we need to increase the production of feet.

We need to employ someone to glue and to screw the sole of the feet.

We need to increase the production." "Excuse me?" I could not believe.

And then he said, "No, we can modify the workbench maybe to put a special stool,

a special anvil, special vice, and maybe an electric screwdriver."

I said, "Listen, it's insane. And it's even cruel to think of anything like this.

That's a production line and a very fast one.

It's cruel to offer him a job knowing that he's going to fail."

But with Najmuddin, we cannot discuss.

So the only things I could manage to obtain was a kind of a compromise.

Only one week -- one week try and not a single day more.

One week later, Mahmoud was the fastest in the production line.

I told Najmuddin, "That's a trick. I can't believe it."

The production was up 20 percent. "It's a trick, it's a trick," I said.

And then I asked for verification. It was true.

 

양 다리도 없고, 한 팔밖에 없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기술도 없는데 무슨일을 할 수 있겠어요?

Najmuddin든 말했습니다."글쎄요. 목공실에 빈자리가 하나 있어요." "뭐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만해." "글쎄요. 의족 생산을 늘려야 하거든요.

우리는 의족바닥에 나사를 죄고, 접합을 할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산을 늘려야할 필요가 있어요."

"뭐라고?"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작업대를 고치고 어쩌면 특별한 의자를 두고 특별한 모루와 특별한 바이스와

그리고 어쩌면 전기 스크루 드라이버를 두면 될거예요." 저는 말했습니다.

"보세요. 그것은 말도 안되요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심지어 가혹한 일입니다.

생산 라인이고 매우 빠릅니다. Mahmoud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일을 준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지요."

 하지만 Najmuddin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종의 협상이었습니다.

단지 일주일, 하루도 보태지 않고 꼭 일주일만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일주일 후, Mahmoud는 생산라인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Najmuddin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술이예요. 믿을 수가 없군요." 생산은 20% 늘었습니다. "이것은 마술이예요, 마술."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인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The comment of Najmuddin was Mahmoud has something to prove.

I understood that I was wrong again. Mahmoud had looked taller.

I remember him sitting behind the workbench smiling. He was a new man, taller again.

Of course, I understood that what made him stand tall

-- yeah they were the legs, thank you very much --

but as a first step, it was the dignity. He has regained his full dignity thanks to that job.

So of course, I understood. And then we started a new policy 

-- a new policy completely different.

We decided to employ as many disabled as possible to train them in any possible job.

It became a policy of "positive discrimination," we call it now.

 

Najmuddin이 저에게 얘기한것은 Mahmoud는 증명할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Mahmoud는 키가 커보였습니다.

저는 그가 작업대 앞에 않아서 웃고 있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키가 커보였습니다. 물론 무엇이 그를 키가 커보이게 했는지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의족이었습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첫 단계는 인간 존엄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완전한 존엄을 되찾았습니다.

일때문에요 물론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새로운 정책,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장애우들을 고용하고 뭐든지 가능한 일을 하도록 훈련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차별"이라는 정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금 그렇게 부릅니다.

 

And you know what? It's good for everybody. Everybody benefits from that

-- those employed, of course, because they get a job and dignity.

But also for the newcomers. They are 7,000 every year -- people coming for the first time. And you should see the faces of these people

when they realize that those assisting them are like them.

Sometimes you see them, they look, "Oh." And you see the faces.

And then the surprise turns into hope. And it's easy for me as well to train

someone who has already passed through the experience of disability.

Poof, they learn much faster -- the motivation, the empathy they can establish

with the patient is completely different, completely. Scraps of men do not exist.

 

그런데 있잖아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일로 혜택을 받았습니다.

물론 고용된 사람들은 직업을 갖고 존엄을 얻게 되면서 혜택을 받았지요.

그리고 새로온 환자들도 혜택을 받았습니다. 매년 7,000명이 오는데 그들은 처음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돕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의 얼굴을 여러분들은 보셔야합니다. 때때로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들은 "어쩌면"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놀라움은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장애를 경험한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은 저로서는 또한 쉬운 일입니다.

휙, 그들은 매우 빨리 일을 배웁니다.

동기, 그리고 그들이 환자에 대해 갖는 공감은 완전히,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인간 쓰레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People like Mahmoud are agents of change.

And when you start changing, you cannot stop.

So employing people, yes, but also we started programming projects of microfinance, education. And when you start, you cannot stop.

So you do vocational training, home education for those who cannot go to school.

Physical therapies can be done, not only in the orthopedic center,

but also in the houses of the people. There is always a better way to do things.

That's Najmuddin, the one with the white coat. Terrible Najmuddin, is that one.

I have learned a lot from people like Najmuddin, Mahmoud, Rafi. They are my teachers.

 

Mahmoud와 같은 사람들은 변화의 동인(動因)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면, 변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소액금융, 교육과 같은 프로젝트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작하면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직업훈련을 하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정 교육을 합니다.

물리 치료는 단지 정형외과 센터에서만 하는 것이아니라 또한 환자들의 집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항상 일을 하는데는 더 나은 길이 있습니다. Najmuddin이 그렇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가 말이지요. 놀라운 Najmuddin이 바로 저 사람입니다.

저는 Najmuddin, Mahmoud, Rafi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제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I have a wish, a big wish, that this way of working,

this way of thinking, is going to be implemented in other countries.

There are plenty of countries at war like Afghanistan.

It is possible and it is not difficult.

All we have to do is to listen to the people that we are supposed assist,

to make them part of the decision-making process and then, of course, to adapt.

This is my big wish.

 

저에게는 소망이, 큰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일과 이런 방식의 사고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시행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전쟁 중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하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우리가 도와주어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의사 결정 과정에 그들이 한 역할을 하게하고 그리고 나서 물론 적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커다란 소망입니다.

 

Well don't think that the changes in Afghanistan are over; not at all. We are going on. Recently we have just started a program, a sport program

-- basketball for wheelchair users. We transport the wheelchairs everywhere.

We have several teams in the main part of Afghanistan.

At the beginning, when Anajulina told me, "We would like to start it,"

I hesitated. I said, "No," you can imagine. I said, "No, no, no, no, we can't."

And then I asked the usual question: "Is it a priority? Is it really necessary?"

Well now you should see me. I never miss a single training session.

The night before a match I'm very nervous. And you should see me during the match.

I shout like a true Italian.

 

아프가니스탄의 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한 프로그램을 막 시작했습니다. 운동 프로그램인데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을 위한 농구입니다.

우리는 휠체어를 모든 곳으로 이송합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지역에 몇개의 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Anajulina가 저에게 "우리는 시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주저했습니다.

상상하신 것 처럼 저는 말했습니다."안되요." 저는 말했습니다."안되요, 안돼,우리는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서 저는 늘 하던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선 사항인가? 이것이 정말 필요한 일인가?"

글쎄요 제 모습을 보셨어야 합니다. 저는 훈련 시간을 한번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경기 전날 밤, 저는 몹시 긴장합니다. 그리고 경기 중에 제가 어떠했는 지를 보셨어야 합니다.

저는 정말 이태리 사람 처럼 소리 쳤습니다.

 

(Laughter)

 

What's next? What is going to be the next change?

Well I don't know yet, but I'm sure Najmuddin and his friends,

they have it already in mind.

 

That was my story. Thank you very much.

 

(웃음)

 

그러면 다음은요? 그 다음의 변화는 무엇일까요? 글쎄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Najmuddin과 그의 친구들은 이미 마음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겠죠.

 

이것이 저의 이야기입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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