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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2때 755명 중 750등 ‘주전자 선수’… 국내 최대 로펌 변호사로 인생 대역전 이종훈씨
《 “감독님…, 저 야구 그만두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감독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1998년 10월 13일. 7년 동안 마운드가 인생의 전부였던 한 고등학교 야구선수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목표도 없었다. 야구선수로 성공하기엔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14년 뒤, 처진 어깨로 야구장을 뒤돌아 나왔던 그 고등학생은 국내 최대 로펌의 변호사로 출근을 앞두고 있다. 삼진아웃의 절망을 딛고 역전타를 쳐낸 이종훈 씨(31·사법시험 51회)의 이야기다. 》
○ 첫 타석: 삼진…주전을 꿈꿨던 ‘주전자 선수’
오늘도 버스가 끊기기 직전까지 스윙 연습을 하다 막차에 올랐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 교정 아래로 해가 떨어진 지는 한참이 지났다. “제길….” 이렇게 연습해도 주전은 다른 선수 몫이다. 내가 10시간 동안 연습해 간신히 해낸 걸 주전 멤버들은 2∼3시간 만에 해냈다. 노력과 실력은 정비례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전자 선수’였다.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이 한 수 위였다.
경기 출전 기회도 거의 없었다. 2학년 공식 출전 기록은 대타로 나간 두 타석뿐이었다. 한번은 대타로라도 나갈 수 있을까 싶어 벤치에서 몸을 풀다 관중석에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애써 웃으며 V자를 그려 보였지만 울음이 복받쳐 올라 고개를 홱 돌렸다.
170cm에서 멈춰 버린 키도 문제였다. 보약도 먹어보고 용하다는 성장클리닉도 찾아갔지만 키는 자라지 않았다.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고 모두 잘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야구를 그만두면 뭘 하지….’
○ 두 번째 타석: 포볼… 기본부터 시작
‘교과서를 어디에 뒀더라….’ 학교 책상 서랍과 사물함을 뒤져봤지만 도통 나타나질 않는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종훈아, 내가 오늘 책을 안 가져왔는데…” 이렇게 친구가 물으면 “어, 사물함에서 꺼내 가. 나 좀 잔다”. 늘 이런 식이었다.
결국 동네 서점에 가서 참고서를 샀다. ∑ ∫ √ ∂…. 사회 국사는 들입다 외우면 되겠지만 수학하고 영어는 답이 없었다. ‘대디’가 아빠라는 건 알았지만 ‘daddy’라는 스펠링은 몰랐다. ‘I love you’도 들으면 알았지만 눈으로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고교 2학년 때 야구를 그만뒀을 당시 성적은 51등. 반 학생은 52명이었다. 실력은 비슷했는데 52등은 다른 야구 선수 몫이었다. 전교생 755명 가운데 750등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1교시 이후 학교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중학교 1학년 수학과 영어 교과서부터 폈다. 단어장을 만들어 ‘play(놀다)’ ‘bird(새)’ 같은 단어 옆에 ‘플레이’ ‘버드’처럼 한글로 발음을 적었다. 다행히 운동을 하면서 다진 체력이 힘이 돼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책과 씨름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중학교 1학년 수학과 영어를 끝내고 중학교 2학년 과정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한 걸음씩, ‘19세짜리 중학생’은 공부에 빠져들었다.
야구를 그만둔 뒤 첫 시험인 2학기 기말고사. 반에서 27등을 했다. 노력한 만큼 되는 것도 있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이따금 교문을 나서다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야구부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 세 번째 타석: 안타… 법대생이 되다
운동으로 가득 채웠던 시간을 공부로 바꿔놓고 살았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는 반에서 14등을, 기말고사에선 11등을 했다.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부모님이 틈틈이 써주던 편지도 큰 힘이 됐다. 어머니는 “새로 시작한 공부가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운동보다 공부가 더 어렵겠지만 잘해 낼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대학 진학의 꿈이 생겼지만 1, 2학년 때 내신 성적으로는 힘들었다. 대학입시 때 내신이 반영되지 않도록 검정고시를 보기로 하고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직전에 자퇴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 노량진 재수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같이 준비했다. 학원 앞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 가게에 가끔 들르는 게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그 다음 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수능을 봤다. 취약 과목인 수학과 영어가 발목을 잡았지만 다행히 수능이 평년보다 쉬웠다. 400점 만점에 363점. ‘꼴찌의 기적’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그에게 법학과를 추천했다. 점수에 맞는 대학은 인하대였다. ‘01학번 인하대 법대생.’ 그가 야구를 포기하고 2년 만에 만들어낸 첫 인생 성적표였다. 1학년 때는 자축하듯 열심히 놀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부 근성이 되살아났다. 야구에선 졌지만 공부에서는 이기고 싶었다. 그는 전공을 살려 사법시험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다음 타석에 들어섰다.
○ 네 번째 타석: 홈런!… 야구선수 출신 첫 김앤장 변호사
상대를 너무 만만히 봤다. 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돼 기대보다 좋은 성적으로 1차 시험에 합격한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2006년 응시한 1차 시험 결과를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전체 합격생 중 5, 6등은 되는 점수였다. 우습게 보였다. 지나친 자신감은 나태함으로 이어졌다. 그해 2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도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니 문제없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정신이 흐트러지자 슬럼프가 찾아왔다. 부담감에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다 창밖을 보면 서서히 동이 터오곤 했다. 체력도 떨어졌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학원으로 향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아예 몇 달 동안 공부에서 손을 놓기도 했다. 결과는 또다시 2차 시험 낙방이었다. 다음 해엔 아예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3루를 갔다 다시 1루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바닥을 치고 나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부터 다잡아야 했다. 우연히 친구의 휴대전화에서 본 ‘나태함, 그 순간은 달콤하나 그 결과는 비참하다’란 글귀가 떠올랐다.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노란색 포스트잇에 써서 책상 앞에도 붙여 놨다(이 문장은 프로야구 두산 김현수 선수도 휴대전화에 저장해 놨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짜증날 때는 스스로 뺨을 때리며 ‘정신 차려’라고 고함을 쳤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합격 수기를 모아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도 읽고 그들의 공부 방법도 따라 했다. 한 합격자가 ‘마인드 맵’(자신의 생각을 지도 그리듯 시각화하는 두뇌개발법)이 좋다고 해서 거기에 빠져 들기도 했다. 무조건 책상 앞에서 오래 버티기만 하던 공부 방법에 요령이 쌓이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며 체력도 되찾았다.
2009년 드디어 기다리던 공이 날아왔다. 갈고닦은 실력으로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고 사법시험 최종 합격이라는 ‘홈런’이 터졌다. 한번 불붙은 방망이는 사법연수원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연수원 1년을 마치고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지원해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인하대 출신 최초이자 야구선수 출신 최초의 김앤장 변호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13년 초 3년의 연수원 과정을 마치면 이 씨는 김앤장의 변호사가 된다.
○ 긍정의 힘으로 준비하는 다음 타석
“원래 우리 팀이 더 잘하는데 오늘은 완패했어요. 하하.”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만난 이 씨는 사회인 야구팀 경기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이 씨는 여전히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틈틈이 야구를 즐겼고, 사법연수원에서도 동기들과 야구동호회를 만들어 사회인 리그에서 뛰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투수와 1루수를 했지만 ‘야구선수 출신은 투수로 뛸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지금은 1루수로만 뛰고 있다.
이 씨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일까. “야구를 그만둔 거, 아쉬움은 많지만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구를 안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평범한 회사원이라도 되었으면 다행일걸요. 야구가 저에게 준 건 승부욕과 근성이었습니다. 야구,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인생 최고의 선물이죠.”
■ 끈기만으로는 안된다… 이종훈씨의 공부 노하우
이종훈 씨가 공부 비결에 눈뜬 것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끈기와 노력만으로 버텼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 씨의 공부 노하우는 뭘까.
①자신의 실력에 맞는 공부를 하라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라. 고등학교 2학년이라도 중학교 1학년 수준이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부는 이해할 수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②함께할 친구를 찾아라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하고 서로 끌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벼락치기’라면 혼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6개월 이상의 장기전에서는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 시험 직전에는 혼자 공부에 ‘다걸기(올인)’하는 게 좋다.
③책 한 권에 몰아넣어라
고시 공부는 과목마다 주 교재를 하나 정해 강의 내용이나 다른 교재의 핵심 내용을 옮겨 적는 게 효과적이다. 처음엔 내용을 적으면서 여러 교재를 봐야 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일단 모든 내용을 총망라한 교재가 만들어지면 그 뒤로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④체력은 기본이다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운동도 잘할 수 있다. 장기적인 공부에 체력은 필수다.
⑤재미가 붙으면 그 다음은 쉽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일수록 일단 한두 달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에 전념해봐라. 그 성과를 바탕으로 모르던 내용을 알게 되고 성적이 조금씩 오르면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공부에 빠져드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인생역전 만루홈런!” 고교시절 야구를 포기한 뒤 극적으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변호사가 된 이종훈 씨가 14일 오후 사회인 야구경기가 열린 경기 고양시 덕양구의 한 야구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사법연수원 동기들로 이뤄진 ‘저스티42(JUSTI42)’팀 소속이다. 고향=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감독님…, 저 야구 그만두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감독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1998년 10월 13일. 7년 동안 마운드가 인생의 전부였던 한 고등학교 야구선수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목표도 없었다. 야구선수로 성공하기엔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14년 뒤, 처진 어깨로 야구장을 뒤돌아 나왔던 그 고등학생은 국내 최대 로펌의 변호사로 출근을 앞두고 있다. 삼진아웃의 절망을 딛고 역전타를 쳐낸 이종훈 씨(31·사법시험 51회)의 이야기다. 》
○ 첫 타석: 삼진…주전을 꿈꿨던 ‘주전자 선수’
오늘도 버스가 끊기기 직전까지 스윙 연습을 하다 막차에 올랐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 교정 아래로 해가 떨어진 지는 한참이 지났다. “제길….” 이렇게 연습해도 주전은 다른 선수 몫이다. 내가 10시간 동안 연습해 간신히 해낸 걸 주전 멤버들은 2∼3시간 만에 해냈다. 노력과 실력은 정비례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전자 선수’였다.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이 한 수 위였다.
경기 출전 기회도 거의 없었다. 2학년 공식 출전 기록은 대타로 나간 두 타석뿐이었다. 한번은 대타로라도 나갈 수 있을까 싶어 벤치에서 몸을 풀다 관중석에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애써 웃으며 V자를 그려 보였지만 울음이 복받쳐 올라 고개를 홱 돌렸다.
170cm에서 멈춰 버린 키도 문제였다. 보약도 먹어보고 용하다는 성장클리닉도 찾아갔지만 키는 자라지 않았다.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고 모두 잘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야구를 그만두면 뭘 하지….’
○ 두 번째 타석: 포볼… 기본부터 시작
이종훈 씨가 공부를 시작한 고2 때 만들었던 영어 단어장. 초보적인 단어들 옆에 한글로 발음을 적어 놓았다.
결국 동네 서점에 가서 참고서를 샀다. ∑ ∫ √ ∂…. 사회 국사는 들입다 외우면 되겠지만 수학하고 영어는 답이 없었다. ‘대디’가 아빠라는 건 알았지만 ‘daddy’라는 스펠링은 몰랐다. ‘I love you’도 들으면 알았지만 눈으로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고교 2학년 때 야구를 그만뒀을 당시 성적은 51등. 반 학생은 52명이었다. 실력은 비슷했는데 52등은 다른 야구 선수 몫이었다. 전교생 755명 가운데 750등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1교시 이후 학교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초부터 시작해야 했다. 중학교 1학년 수학과 영어 교과서부터 폈다. 단어장을 만들어 ‘play(놀다)’ ‘bird(새)’ 같은 단어 옆에 ‘플레이’ ‘버드’처럼 한글로 발음을 적었다. 다행히 운동을 하면서 다진 체력이 힘이 돼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책과 씨름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중학교 1학년 수학과 영어를 끝내고 중학교 2학년 과정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한 걸음씩, ‘19세짜리 중학생’은 공부에 빠져들었다.
야구를 그만둔 뒤 첫 시험인 2학기 기말고사. 반에서 27등을 했다. 노력한 만큼 되는 것도 있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이따금 교문을 나서다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야구부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 세 번째 타석: 안타… 법대생이 되다
고교 야구선수 시절 이종훈 씨.
집에서 가까운 서울 노량진 재수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같이 준비했다. 학원 앞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 가게에 가끔 들르는 게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그 다음 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수능을 봤다. 취약 과목인 수학과 영어가 발목을 잡았지만 다행히 수능이 평년보다 쉬웠다. 400점 만점에 363점. ‘꼴찌의 기적’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그에게 법학과를 추천했다. 점수에 맞는 대학은 인하대였다. ‘01학번 인하대 법대생.’ 그가 야구를 포기하고 2년 만에 만들어낸 첫 인생 성적표였다. 1학년 때는 자축하듯 열심히 놀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부 근성이 되살아났다. 야구에선 졌지만 공부에서는 이기고 싶었다. 그는 전공을 살려 사법시험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다음 타석에 들어섰다.
○ 네 번째 타석: 홈런!… 야구선수 출신 첫 김앤장 변호사
상대를 너무 만만히 봤다. 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돼 기대보다 좋은 성적으로 1차 시험에 합격한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2006년 응시한 1차 시험 결과를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전체 합격생 중 5, 6등은 되는 점수였다. 우습게 보였다. 지나친 자신감은 나태함으로 이어졌다. 그해 2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도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니 문제없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정신이 흐트러지자 슬럼프가 찾아왔다. 부담감에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다 창밖을 보면 서서히 동이 터오곤 했다. 체력도 떨어졌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학원으로 향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아예 몇 달 동안 공부에서 손을 놓기도 했다. 결과는 또다시 2차 시험 낙방이었다. 다음 해엔 아예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3루를 갔다 다시 1루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바닥을 치고 나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부터 다잡아야 했다. 우연히 친구의 휴대전화에서 본 ‘나태함, 그 순간은 달콤하나 그 결과는 비참하다’란 글귀가 떠올랐다.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노란색 포스트잇에 써서 책상 앞에도 붙여 놨다(이 문장은 프로야구 두산 김현수 선수도 휴대전화에 저장해 놨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짜증날 때는 스스로 뺨을 때리며 ‘정신 차려’라고 고함을 쳤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합격 수기를 모아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도 읽고 그들의 공부 방법도 따라 했다. 한 합격자가 ‘마인드 맵’(자신의 생각을 지도 그리듯 시각화하는 두뇌개발법)이 좋다고 해서 거기에 빠져 들기도 했다. 무조건 책상 앞에서 오래 버티기만 하던 공부 방법에 요령이 쌓이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며 체력도 되찾았다.
2009년 드디어 기다리던 공이 날아왔다. 갈고닦은 실력으로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고 사법시험 최종 합격이라는 ‘홈런’이 터졌다. 한번 불붙은 방망이는 사법연수원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연수원 1년을 마치고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지원해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인하대 출신 최초이자 야구선수 출신 최초의 김앤장 변호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13년 초 3년의 연수원 과정을 마치면 이 씨는 김앤장의 변호사가 된다.
○ 긍정의 힘으로 준비하는 다음 타석
“원래 우리 팀이 더 잘하는데 오늘은 완패했어요. 하하.”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만난 이 씨는 사회인 야구팀 경기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이 씨는 여전히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틈틈이 야구를 즐겼고, 사법연수원에서도 동기들과 야구동호회를 만들어 사회인 리그에서 뛰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투수와 1루수를 했지만 ‘야구선수 출신은 투수로 뛸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지금은 1루수로만 뛰고 있다.
이 씨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일까. “야구를 그만둔 거, 아쉬움은 많지만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구를 안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평범한 회사원이라도 되었으면 다행일걸요. 야구가 저에게 준 건 승부욕과 근성이었습니다. 야구,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인생 최고의 선물이죠.”
■ 끈기만으로는 안된다… 이종훈씨의 공부 노하우
이종훈 씨가 공부 비결에 눈뜬 것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무조건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끈기와 노력만으로 버텼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 씨의 공부 노하우는 뭘까.
①자신의 실력에 맞는 공부를 하라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라. 고등학교 2학년이라도 중학교 1학년 수준이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부는 이해할 수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②함께할 친구를 찾아라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하고 서로 끌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벼락치기’라면 혼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6개월 이상의 장기전에서는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 시험 직전에는 혼자 공부에 ‘다걸기(올인)’하는 게 좋다.
③책 한 권에 몰아넣어라
고시 공부는 과목마다 주 교재를 하나 정해 강의 내용이나 다른 교재의 핵심 내용을 옮겨 적는 게 효과적이다. 처음엔 내용을 적으면서 여러 교재를 봐야 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일단 모든 내용을 총망라한 교재가 만들어지면 그 뒤로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④체력은 기본이다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운동도 잘할 수 있다. 장기적인 공부에 체력은 필수다.
⑤재미가 붙으면 그 다음은 쉽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일수록 일단 한두 달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에 전념해봐라. 그 성과를 바탕으로 모르던 내용을 알게 되고 성적이 조금씩 오르면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공부에 빠져드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