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re Perfect Union' (오바마 필라델피아 연설)
Philadelphia, PA | March 18, 2008
As Prepared for Delivery
‘We the people, 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Two hundred and twenty one years ago, in a hall that still stands across the street, a group of men gathered and, with these simple words, launched America´s improbable experiment in democracy. Farmers and scholars; statesmen and patriots who had traveled across an ocean to escape tyranny and persecution finally made real their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t a Philadelphia convention that lasted through the spring of 1787.
‘우리 미국인은, 보다 완전한 통합을 위하여.’
221년 전, 길 건너편 회관에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단순한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농부와 학자, 정치가와 애국자 등 폭정과 처형을 피해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1787년 봄 필라델피아에서 진정한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781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1783년 13개 식민지가 독립했다. 독립 후 13개 주는 연방주의와 분리주의로 대립했으나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된 헌법제정회의를 통해 연방주의, 삼권분립, 민주주의 원칙을 담은 합중국 헌법이 제정됐다.
오바마 민주당 상원의원은 경쟁 후보 측에서 유색인인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혹을 확산시키고 이것이 흑인들의 분노, 나아가 인종 간 균열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는 시점에 필라델피아 내셔널헌법센터에서 연설했다. 그는 독립선언에 담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고, 이를 메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The document they produced was eventually signed but ultimately unfinished. It was stained by this nation´s original sin of slavery, a question that divided the colonies and brought the convention to a stalemate until the founders chose to allow the slave trade to continue for at least 20 more years, and to leave any final resolution to future generations.
Of course, the answer to the slavery question was already embedded within our Constitution - a Constitution that had at its very core the ideal of equal citizenship under the law; a Constitution that promised its people liberty, and justice, and a union that could be and should be perfected over time.
이들이 만든 헌법이 마침내 발효됐지만, 궁극적으로 완료된 건 아니었습니다. 이 헌법은 미국의 원죄인 노예제로 얼룩졌습니다. 노예제 문제는 (13개) 주(州)를 분열시키고, 제헌의회를 교착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미국의 창시자들이 노예무역을 허용하고, 뒷일은 후대에 맡기기로 결정할 때까지 최소 20년 넘게 말입니다.
물론, 노예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우리 헌법에 들어 있었습니다. 헌법은 ‘법 앞에 평등한 시민’이라는 이상을 핵심으로 삼았으며, 국민에게 자유와 정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통합을 약속했으니까요.
(founders, Founding Fathers: 미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 사람들을 미국의 창시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소유주였다.)
오바마의 할머니 세라 아냥고 오바마(86). 케냐에 있는 그녀의 집은 미 대선에 출마한 손자 버락 오바마 덕에 요즘 문전성시다.
And yet words on a parchment would not be enough to deliver slaves from bondage, or provide men and women of every color and creed their full rights and obligations as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What would be needed were Americans in successive generations who were willing to do their part - through protests and struggle, on the streets and in the courts, through a civil war and civil disobedience and always at great risk - to narrow that gap between the promise of our ideals and the reality of their time.
그러나 양피지에 적힌 단어만으로는, 노예를 해방하고 피부색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남녀에게 미국시민의 완전한 권리와 의무를 제공하는 데 충분치 않았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기꺼이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한 다음 세대의 미국인이었습니다. 거리와 법정에서의 항의와 투쟁, 내전과 시민불복종을 통해 늘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이상이 약속한 바와 시대적 현실의 격차를 좁히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a civil war: 노예제도를 반대한 북부공화당 링컨 대통령의 당선으로 촉발된 남북전쟁(1861~65년)을 가리킨다. civil disobedience: 1950~7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비폭력 흑인인권운동을 주로 지칭한다.)
This was one of the tasks we set forth at the beginning of this campaign - to continue the long march of those who came before us, a march for a more just, more equal, more free, more caring and more prosperous America. I chose to run for the presidency at this moment in history because I believe deeply that we cannot solve the challenges of our time unless we solve them together - unless we perfect our union by understanding that we may have different stories, but we hold common hopes; that we may not look the same and we may not have come from the same place, but we all want to move in the same direction - towards a better future for our children and our grandchildren. This belief comes from my unyielding faith in the decency and generosity of the American people. But it also comes from my own American story.
우리가 선거캠페인 초기에 설정한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의 긴 행진을, 더욱 공정하고 더욱 평등하고 더욱 자유롭고 더욱 잘 보살피며 더욱 번영한 미국을 향한 행진으로 이어가는 것 말입니다. 제가 하필 이 시점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풀지 않는 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풀 수 없다고 깊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각기 다른 사연을 가졌지만 희망은 같다는 점, 생김새나 출생지는 달라도 자식과 손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남겨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선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완벽한 통합을 이뤄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신념은 미국 국민의 품격과 관용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는 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제 자신의 아메리칸 스토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I am the son of a black man from Kenya and a white woman from Kansas. I was raised with the help of a white grandfather who survived a Depression to serve in Patton´s Army during World War II and a white grandmother who worked on a bomber assembly line at Fort Leavenworth while he was overseas. I´ve gone to some of the best schools in America and lived in one of the world´s poorest nations. I am married to a black American who carries within her the blood of slaves and slaveowners - an inheritance we pass on to our two precious daughters. I have brothers, sisters, nieces, nephews, uncles and cousins, of every race and every hue, scattered across three continents, and for as long as I live, I will never forget that in no other country on Earth is my story even possible.
저는 케냐 출신의 흑인남성과 캔자스 출신의 백인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를 키워주신 백인할아버지는 경제공황을 딛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패튼 군단에서 복무했으며, 할아버지가 바다 건너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백인할머니는 포트 리븐워드에 있는 폭격기 제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장 좋다고 손꼽히는 학교를 나왔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산 적도 있습니다. 노예의 피와 노예소유주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흑인 미국여자와 결혼해서 이 혈통을 사랑스러운 두 딸에게도 물려주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의 제 형제자매와 조카들, 삼촌과 사촌들은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채 3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 지구상 어디에서도 저와 같은 경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패튼의 기갑군단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로멜 전차군단을 분쇄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바마의 케냐 출신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는 오바마가 어릴 적에 이혼했다. 그 후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해 여동생이 태어났고,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살기도 했다. 어머니는 얼마 후 이 인도네시아인과 헤어졌다. 이런 가족사로 인해 오바마의 친척들이 미국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바마 상원의원이 3월3일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스터빌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지지자들과 악수하며 환호에 답하고 있다.
It´s a story that hasn´t made me the most conventional candidate. But it is a story that has seared into my genetic makeup the idea that this nation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ts - that out of many, we are truly one.
Throughout the first year of this campaign, against all predictions to the contrary, we saw how hungry the American people were for this message of unity. Despite the temptation to view my candidacy through a purely racial lens, we won commanding victories in states with some of the whitest populations in the country. In South Carolina, where the Confederate Flag still flies, we built a powerful coalition of African-Americans and white Americans.
이런 사연이 저를 과거의 후보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단지 그 구성원들을 모두 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라는 생각을 제 유전인자에 각인했거든요.
우리는 선거캠페인 첫해 내내, 모든 예측을 뒤집고 미국 국민이 얼마나 이러한 통합의 메시지를 갈구해왔는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저의 입후보를 순전히 인종적 렌즈를 통해 보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인이 밀집한 여러 주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직도 동맹기가 나부끼고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조차 우리는 흑인과 백인의 강력한 연대를 이뤄냈습니다.
(Confederate: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 유지를 주장하며 미연방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남부동맹을 지칭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 등 7개 주가 참여했다.)
This is not to say that race has not been an issue in the campaign. At various stages in the campaign, some commentators have deemed me either “too black” or “not black enough.” We saw racial tensions bubble to the surface during the week before the South Carolina primary. The press has scoured every exit poll for the latest evidence of racial polarization, not just in terms of white and black, but black and brown as well. And yet, it has only been in the last couple of weeks that the discussion of race in this campaign has taken a particularly divisive turn.
그렇다고 이번 선거에서 인종이 전혀 이슈가 아니었다는 건 아닙니다. 이번 선거의 여러 국면에서, 저를 “지나치게 흑인”이라거나 또는 “흑인이라고 보기엔 충분치 않다”고 논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예비선거를 앞둔 일주일 동안 인종적 긴장이 표면으로 들끓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론은 출구조사를 실시함으로써, 투표자의 인종에 따라 지지율이 양극화하는 최신 증거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단지 흑-백뿐 아니라 흑-갈색으로까지 분류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인종에 관한 논쟁이 특히 달아오르는 것은 최근 몇 주 동안이었습니다.
(primary: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정당별 후보를 선출하는 예비경선의 한 방식. 등록된 당원만 참여할 수 있는 Caucus와 달리 당원이 아니라도 참여할 수 있어 오픈 프라이머리라고도 한다.)
On one end of the spectrum, we´ve heard the implication that my candidacy is somehow an exercise in affirmative action, that it´s based solely on the desire of wide-eyed liberals to purchase racial reconciliation on the cheap. On the other end, we´ve heard my former pastor, Reverend Jeremiah Wright, use incendiary language to express views that have the potential not only to widen the racial divide, but views that denigrate both the greatness and the goodness of our nation - that rightly offend white and black alike.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는, 나의 출마를 놓고 인종화해를 값싸게 구입하려는 순진한 자유주의자들의 소망에서 비롯된 일종의 차별철폐조처(affirmative action)라는 식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 반대쪽 끝에서는, 과거 나의 담임목사였던 라이트 목사가 선동적인 언어로 인종분열을 확대할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고귀함과 우수성을 모두 훼손함으로써 백인과 흑인을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Affirmative Action: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뉜다. 소극적인 조처로는 형식적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불평등 대우 금지’와 같은 제도가 있다. 적극적 조처로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기회의 평등을 파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소외계층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와 적극적 우대를 위한 affirmative action이 도입됐다. 미국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할 때, 흑인을 포함한 소수계층을 일정 비율로 선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소수계 우대정책이라고도 한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40주기를 맞아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의 국립 인권박물관에 그를 추모하는 화환이 걸렸다. 1968년 4월4일 킹 목사는 당시 로레인 모텔이었던 이곳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제임스 얼 레이라는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I have already condemned, in unequivocal terms, the statements of Rev. Wright that have caused such controversy. For some, nagging questions remain. Did I know him to be an occasionally fierce critic of American domestic and foreign policy? Of course. Did I ever hear him make remarks that could be considered controversial while I sat in church? Yes. Did I strongly disagree with many of his political views? Absolutely - just as I´m sure many of you have heard remarks from your pastors, priests or rabbis with which you strongly disagreed.
저는 이미 분명한 어조로 라이트 목사의 발언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라이트 목사가 종종 미국의 대내외 정책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요? 물론입니다. 라이트 목사가 교회에서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느냐고요? 그럼요.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느냐고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사나 신부, 랍비가 여러분과 아주 다른 견해를 드러내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But the remarks that have caused this recent firestorm weren´t simply controversial. They weren´t simply a religious leader´s effort to speak out against perceived injustice. Instead, they expressed a profoundly distorted view of this country - a view that sees white racism as endemic, and that elevates what is wrong with America above all that we know is right with America, a view that sees the conflicts in the Middle East as rooted primarily in the actions of stalwart allies like Israel, instead of emanating from the perverse and hateful ideologies of radical Islam.
하지만 최근의 발언은 단순한 논란거리에 그치지 않고, 감정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그 발언은 단순히 공공연한 부당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려는 한 종교지도자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의 심하게 비틀린 시각, 바로 백인우월주의를 지역 특성으로 간주하고, 미국의 잘못을 강조하는 나머지 미국의 옳은 점은 간과하며, 중동 갈등의 원인을 급진적 이슬람세력의 증오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동맹국의 영향에서 찾는 견해를 드러낸 것입니다.
As such, Rev. Wright´s comments were not only wrong but divisive, divisive at a time when we need unity; racially charged at a time when we need to come together to solve a set of monumental problems - two wars, a terrorist threat, a falling economy, a chronic health care crisis and potentially devastating climate change; problems that are neither black or white or Latino or Asian, but rather problems that confront us all.
라이트 목사의 발언은 잘못됐을 뿐 아니라, 통합이 필요한 시기에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산적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할 때에 인종의식으로 얽매어놓았습니다. 두 번의 전쟁과 테러 위협, 추락하는 경제, 만성적인 건강관리시스템 위기와 심각한 기후변화 같은 문제들은 흑인, 백인, 라틴계, 아시아인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Given my background, my politics, and my professed values and ideals, there will no doubt be those for whom my statements of condemnation are not enough. Why associate myself with Rev. Wright in the first place, they may ask? Why not join another church? And I confess that if all that I knew of Rev. Wright were the snippets of those sermons that have run in an endless loop on the television and YouTube, or if Trinity United Church of Christ conformed to the caricatures being peddled by some commentators, there is no doubt that I would react in much the same way.
저의 성장배경, 정치관, 그리고 가치관과 이상을 두고 본다면, 제 비판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애초에 라이트 목사와 관계를 맺은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겠죠? 고백하건대, 제가 라이트 목사에 대해 아는 바가, 텔레비전과 유투브에 끊임없이 떠도는 파편적인 설교 수준이라면, 혹은 일부 논평가가 퍼뜨린 풍자만화에 대해 트리니티 연합교회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했을 것입니다.
But the truth is, that isn´t all that I know of the man. The man I met more than 20 years ago is a man who helped introduce me to my Christian faith, a man who spoke to me about our obligations to love one another; to care for the sick and lift up the poor. He is a man who served his country as a U.S. Marine, who has studied and lectured at some of the finest universities and seminaries in the country, and who for over thirty years led a church that serves the community by doing God´s work here on Earth - by housing the homeless, ministering to the needy, providing day care services and scholarships and prison ministries, and reaching out to those suffering from HIV/AIDS.
그러나 진실은, 제가 아는 라이트 목사의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20년도 더 전에 처음 만난 그 사람은, 저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었고, 서로를 사랑하며 약한 자를 보살피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게 우리의 의무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는 미 해병대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했고, 최고의 대학과 신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했습니다. 30년 넘게 교회를 이끌며 지역사회에 봉사해왔습니다. 노숙자들을 재워주고, 빈곤한 자를 보살피고, 탁아서비스와 장학금 및 교도소 사역을 제공하고, 에이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등 이곳 지상에서 신의 사역을 실천해왔습니다.
In my first book, “Dreams From My Father,” I described the experience of my first service at Trinity:
“People began to shout, to rise from their seats and clap and cry out, a forceful wind carrying the reverend´s voice up into the rafters … And in that single note - hope! - I heard something else; at the foot of that cross, inside the thousands of churches across the city, I imagined the stories of ordinary black people merging with the stories of David and Goliath, Moses and Pharaoh, the Christians in the lion´s den, Ezekiel´s field of dry bones. Those stories - of survival, and freedom, and hope - became our story, my story; the blood that had spilled was our blood, the tears our tears; until this black church, on this bright day, seemed once more a vessel carrying the story of a people into future generations and into a larger world. Our trials and triumphs became at once unique and universal, black and more than black; in chronicling our journey, the stories and songs gave us a means to reclaim memories that we didn´t need to feel shame about … memories that all people might study and cherish - and with which we could start to rebuild.”
제 첫 번째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트리니티 교회에서의 첫 예배 경험을 기술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거센 바람이 목사의 음성을 서까래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그 한 단어, ‘희망’에서 나는 다른 어떤 소리를 들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 도시에 있는 수천 개의 교회 안에서, 평범한 흑인들의 이야기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모세와 파라오 이야기, 사자굴 속의 기독교인 이야기, 에스겔의 뼈 골짜기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이 그려졌다. 생존과 자유와 희망에 관한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가 됐다.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우리의 피와 눈물이었다. 이 흑인교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래의 다음 세대로, 더 넓은 세상으로 전하는 함선처럼 보였다. 우리의 시련과 승리는 우리만의 독특한 것인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며, 흑인의 것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 됐다. 우리의 여정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 이야기와 노래는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연구하고 소중하게 여길 기억,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억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단이었다.”
That has been my experience at Trinity. Like other predominantly black churches across the country, Trinity embodies the black community in its entirety - the doctor and the welfare mom, the model student and the former gang-banger. Like other black churches, Trinity´s services are full of raucous laughter and sometimes bawdy humor. They are full of dancing, clapping, screaming and shouting that may seem jarring to the untrained ear. The church contains in full the kindness and cruelty, the fierce intelligence and the shocking ignorance, the struggles and successes, the love and yes, the bitterness and bias that make up the black experience in America.
트리니티교회에 대한 제 경험은 그랬습니다. 흑인이 많이 다니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트리니티교회 또한 의사와 생활보조금을 받는 모자가정, 모범생과 과거의 갱단원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의 흑인공동체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트리니티교회의 예배는 다른 흑인교회와 마찬가지로 요란한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이따금 다소 외설적인 유머가 가미되기도 합니다. 춤과 박수, 외침과 환호로 가득 차,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귀에는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친절과 무자비함, 날카로운 지성과 놀랄 만한 무지, 역경과 성공, 사랑과 긍정, 냉소와 편견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모두 흑인이 미국에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And this helps explain, perhaps, my relationship with Rev. Wright. As imperfect as he may be, he has been like family to me. He strengthened my faith, officiated my wedding, and baptized my children. Not once in my conversations with him have I heard him talk about any ethnic group in derogatory terms, or treat whites with whom he interacted with anything but courtesy and respect. He contains within him the contradictions - the good and the bad - of the community that he has served diligently for so many years.
이것 또한 저와 라이트 목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가 비록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겐 가족과 같습니다. 그는 저의 믿음을 튼튼하게 했고, 결혼식 주례를 서주었으며, 제 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대화 중에 어떤 인종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가 알고 지내는 백인들에게 호의와 존중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I can no more disown him than I can disown the black community. I can no more disown him than I can my white grandmother - a woman who helped raise me, a woman who sacrificed again and again for me, a woman who loves me as much as she loves anything in this world, but a woman who once confessed her fear of black men who passed by her on the street, and who on more than one occasion has uttered racial or ethnic stereotypes that made me cringe.
저는 흑인공동체를 버릴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라이트 목사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습니다. 백인할머니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키우셨고, 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으며, 저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젠가 길에서 흑인 남자들이 옆으로 지나가면 무섭다고 털어놨고, 종종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서 저를 당혹스럽게 했죠.
These people are a part of me. And they are a part of America, this country that I love.
Some will see this as an attempt to justify or excuse comments that are simply inexcusable. I can assure you it is not. I suppose the politically safe thing would be to move on from this episode and just hope that it fades into the woodwork. We can dismiss Rev. Wright as a crank or a demagogue, just as some have dismissed Geraldine Ferraro, in the aftermath of her recent statements, as harboring some deep-seated racial bias.
이 사람들은 저의 일부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미국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발언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겠죠. 단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전한 방법은 이 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얼른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라이트 목사를 괴짜나 선동가라고 비난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힐러리 클린턴 캠프의) 제랄딘 페라로가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자, 심각한 인종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내친 사람들처럼 말이죠.
(Geraldine Ferraro: 1984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여성 최초의 부통령후보였다. 최근 힐러리 상원의원 캠프에서 자금모금을 담당했으나, ‘오바마가 백인남성이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을 일으키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But race is an issue that I believe this nation cannot afford to ignore right now. We would be making the same mistake that Rev. Wright made in his offending sermons about America - to simplify and stereotype and amplify the negative to the point that it distorts reality.
The fact is that the comments that have been made and the issues that have surfaced over the last few weeks reflect the complexities of race in this country that we´ve never really worked through - a part of our union that we have yet to perfect. And if we walk away now, if we simply retreat into our respective corners, we will never be able to come together and solve challenges like health care, or education, or the need to find good jobs for every American.
하지만 인종갈등은 지금 이 나라가 무시해도 될 만한 이슈가 아닙니다. 라이트 목사가 미국에 대해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거스른 것과 똑같은 실수를 우리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단순화하고, 정형화하고, 부풀려서, 결국 현실을 왜곡하고 마는 실수를요.
지난 몇 주 동안의 발언과 이슈들은,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꿰뚫어본 적 없는 이 나라의 인종적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완전하게 통합해야 할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지나가버리면, 각자의 구석으로 물러나버리면,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모든 미국인을 위한 건강보험, 교육, 일자리 같은 과제를 풀어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Understanding this reality requires a reminder of how we arrived at this point. As William Faulkner once wrote, “The past isn´t dead and buried. In fact, it isn´t even past.” We do not need to recite here the history of racial injustice in this country. But we do need to remind ourselves that so many of the disparities that exist in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today can be directly traced to inequalities passed on from an earlier generation that suffered under the brutal legacy of slavery and Jim Crow.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를 상기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과거는 죽어 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과거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나라의 인종차별 역사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 흑인사회가 겪는 많은 차별이, 노예제도와 짐 크로의 무자비한 유산하에서 고통 받은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불평등에 직접적으로 기인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William Faulkner: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고함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 등 다수의 저서를 남김.)
(Jim Crow: 1830년대 이후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흉내를 낸 ‘minstrel show’에 나오는 등장인물. 19세기말에 이르러 남부를 중심으로 실시된 흑백분리정책 전반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Segregated schools were, and are, inferior schools; we still haven´t fixed them, fifty years after Brown v. Board of Education, and the inferior education they provided, then and now, helps explain the pervasive achievement gap between today´s black and white students.
Legalized discrimination - where blacks were prevented, often through violence, from owning property, or loans were not granted to African-American business owners, or black homeowners could not access FHA mortgages, or blacks were excluded from unions, or the police force, or fire departments - meant that black families could not amass any meaningful wealth to bequeath to future generations. That history helps explain the wealth and income gap between black and white, and the concentrated pockets of poverty that persists in so many of today´s urban and rural communities.
인종 분리 학교들은 열악했고, 지금도 열악합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이 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학교 교육은, 오늘날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의 성취도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법적 차별은 어떻습니까. 흑인은 종종 폭행을 당하면서까지 재산 소유를 방해받았고, 흑인 사업가들에겐 은행대출이 안 됐고, 흑인은 주택을 소유했더라도 FHA 모기지를 이용할 수 없었으며, 노동조합에서도 배제되고, 경찰이나 소방서 근무도 할 수 없었지요. 이런 법적 차별로 인해 흑인 가족은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재산을 축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흑인과 백인의 부와 소득 격차, 그리고 상당수 도시와 교외에 존재하는 빈곤층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4년의 대법원 판결. 집에서 가까운 백인학교에 흑인자녀를 보내려는 올리버 브라운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 대법원 판결은 이후 흑백분리정책을 폐지하는 법적인 토대가 됐다.)
(FHA mortgages: 연방주택관리국(Federal Housing Administration)에서 주관하는 주택담보 장기융자.)
A lack of economic opportunity among black men, and the shame and frustration that came from not being able to provide for one´s family, contributed to the erosion of black families - a problem that welfare policies for many years may have worsened. And the lack of basic services in so many urban black neighborhoods - parks for kids to play in, police walking the beat, regular garbage pick-up and building code enforcement - all helped create a cycle of violence, blight and neglect that continue to haunt us.
경제적 기회가 결여되고,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수치심과 좌절은 흑인 가족을 곤경에 빠뜨렸고, 국가 복지정책으로 인해 악화됐을 겁니다. 흑인이 거주하는 많은 도시 지역에 대한 기초 서비스, 이를테면 아이들을 위한 공원, 경찰의 순찰, 규칙적인 쓰레기 수거, 건축물 규제 등이 결여됨에 따라 폭력과 황폐, 방치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This is the reality in which Rev. Wright and other African-Americans of his generation grew up. They came of age in the late fifties and early sixties, a time when segregation was still the law of the land and opportunity was systematically constricted. What´s remarkable is not how many failed in the face of discrimination, but rather how many men and women overcame the odds; how many were able to make a way out of no way for those like me who would come after them.
이것이 바로 라이트 목사와 그 세대의 흑인 미국인이 자라온 환경입니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성인이 되었는데, 당시 흑백분리가 법으로 존재하고 있어 제도적으로 흑인에 대한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차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좌절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곤란을 극복하고 나 같은 후손을 위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But for all those who scratched and clawed their way to get a piece of the American Dream, there were many who didn´t make it - those who were ultimately defeated, in one way or another, by discrimination. That legacy of defeat was passed on to future generations - those young men and, increasingly, young women who we see standing on street corners or languishing in our prisons, without hope or prospects for the future. Even for those blacks who did make it, questions of race, and racism, continue to define their world view in fundamental ways. For the men and women of Rev. Wright´s generation, the memories of humiliation and doubt and fear have not gone away; nor has the anger and the bitterness of those years. That anger may not get expressed in public, in front of white co-workers or white friends. But it does find voice in the barbershop or around the kitchen table. At times, that anger is exploited by politicians, to gin up votes along racial lines, or to make up for a politician´s own failings.
그러나 역경을 딛고 한 조각의 아메리칸 드림을 차지한 사람에 비해, 그러지 못한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차별에 의해 결국 패배한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패배의 유산은 후손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젊은 청년이나, 점점 더 많은 젊은 여성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길모퉁이를 서성이거나 감옥에서 병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하는 흑인들조차도 인종과 인종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그런 근본적인 방식으로 한정짓습니다. 라이트 목사와 같은 세대의 남녀에게서 굴욕과 의심, 두려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으며, 과거의 분노와 쓰라림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분노가 공개적으로, 백인 동료나 친구들 앞에서 표출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발소나 밥상 앞에서 목소리를 내지요. 때때로 정치가들이 인종에 호소해 표를 얻으려고 하거나, 자기 자신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런 분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And occasionally it finds voice in the church on Sunday morning, in the pulpit and in the pews. The fact that so many people are surprised to hear that anger in some of Rev. Wright´s sermons simply reminds us of the old truism that the most segregated hour in American life occurs on Sunday morning. That anger is not always productive; indeed, all too often it distracts attention from solving real problems; it keeps us from squarely facing our own complicity in our condition, and prevents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from forging the alliances it needs to bring about real change. But the anger is real; it is powerful; and to simply wish it away, to condemn it without understanding its roots, only serves to widen the chasm of misunderstanding that exists between the races.
그 노여움이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라이트 목사의 설교 일부에 드러난 노여움을 듣고 아주 많은 사람이 놀랐다는 사실은, 미국인의 삶에서 일요일 아침이 가장 인종 분리된 시간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상기시켜줄 따름입니다. 그러한 노여움이 항상 생산적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을 흩뜨리고, 우리가 각자 처한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게 하며, 미국 흑인사회가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연대하는 것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 노여움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합니다. 단순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그 뿌리에 대한 이해 없이 비난하는 것은 인종 간에 존재하는 오해의 수렁을 넓힐 뿐입니다.
In fact, a similar anger exists within segments of the white community. Most working- and middle-class white Americans don´t feel that they have been particularly privileged by their race. Their experience is the immigrant experience - as far as they´re concerned, no one´s handed them anything, they´ve built it from scratch. They´ve worked hard all their lives, many times only to see their jobs shipped overseas or their pension dumped after a lifetime of labor. They are anxious about their futures, and feel their dreams slipping away; in an era of stagnant wages and global competition, opportunity comes to be seen as a zero sum game, in which your dreams come at my expense. So when they are told to bus their children to a school across town; when they hear that an African-American is getting an advantage in landing a good job or a spot in a good college because of an injustice that they themselves never committed; when they´re told that their fears about crime in urban neighborhoods are somehow prejudiced, resentment builds over time.
사실 이와 유사한 노여움이 백인 사회 일부에도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백인 중산-노동자계층은 자신들이 인종적 혜택을 받아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민자의 삶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았으며, 순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일터가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평생 일해서 모은 연금이 헐값이 되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의 꿈이 미끄러져 나가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동결된 임금과 세계 경쟁으로 인해, 기회는 제로섬 게임으로 비칩니다. 남의 성공은 곧 나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고 보는 거죠. 그리하여 자녀를 멀리 떨어진 학교에 버스 태워 보내야 할 때,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데 흑인에게 혜택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리고 도시 주택가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선입관에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 그들에게 분노가 쌓입니다.
(제로섬게임: 경제학에서 발달한 게임이론의 한 형식. 게임 참여자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면 ‘0’이 나오므로 ‘영합게임’이라고도 한다. 이 게임에서는 상대의 이익은 곧 나의 손실로 연결된다.)
Like the anger within the black community, these resentments aren´t always expressed in polite company. But they have helped shape the political landscape for at least a generation. Anger over welfare and affirmative action helped forge the Reagan Coalition. Politicians routinely exploited fears of crime for their own electoral ends. Talk show hosts and conservative commentators built entire careers unmasking bogus claims of racism while dismissing legitimate discussions of racial injustice and inequality as mere political correctness or reverse racism.
흑인사회의 분노와 마찬가지로, 백인사회 일부의 이런 분노 역시 교양 있는 모임에서는 잘 표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적어도 한 세대의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복지와 차별철폐조처에 대한 노여움은 레이건 연대 형성에 일조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이길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했습니다. 토크쇼 진행자들과 보수논객들은 인종차별과 부당성에 대한 정당한 토론조차 단순히 정치적 신중함이나 역인종차별이라고 깎아내림으로써 명성을 쌓았습니다.
(political correctness: 성, 인종, 장애 등으로 인해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회적 소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나 정책을 의미한다.)
(Reagan Coalition: 1980년과 1984년에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게 투표한 정치세력. 사회경제적으로 보수 성향을 띤 백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민주당원이면서 레이건에 투표한 사람들은 Reagan Democrats로 불렸다.)
Just as black anger often proved counterproductive, so have these white resentments distracted attention from the real culprits of the middle-class squeeze - a corporate culture rife with inside dealing, questionable accounting practices and short-term greed; a Washington dominated by lobbyists and special interests; economic policies that favor the few over the many. And yet, to wish away the resentments of white Americans, to label them as misguided or even racist, without recognizing they are grounded in legitimate concerns - this too widens the racial divide, and blocks the path to understanding.
흑인의 노여움이 종종 반(反)생산적이었던 것처럼, 백인의 분노 역시 중산층을 쥐어짜는 실체로부터 관심을 흩뜨려놓았습니다. 정작 주범은, 빈발하는 내부거래와 의문투성이 회계 처리, 단기 이익에 급급한 기업문화, 로비스트와 특수 이익단체들이 장악한 워싱턴, 다수가 아닌 소수를 위한 경제 정책인데 말이죠. 그럼에도 미국 백인의 분노가 사라지기만 바라고, 그들이 오해하고 있다거나 심지어는 인종주의자라고 분류하면서, 그들이 걱정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면, 이 또한 인종 간의 거리를 넓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듭니다.
(워싱턴 D.C.에는 입법 활동을 하는 연방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로비스트나 이익집단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 의회는, 워싱턴에 상주할 수 없는 다수보다 오히려 소수의 이해를 많이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questionable accounting practices: 분식회계 등을 통해 회사의 가치를 부풀려 주식가격을 조작하는 행위.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단기 이익에 민감한 주주 및 전문경영인들이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This is where we are right now. It´s a racial stalemate we´ve been stuck in for years. Contrary to the claims of some of my critics, black and white, I have never been so naive as to believe that we can get beyond our racial divisions in a single election cycle, or with a single candidacy - particularly a candidacy as imperfect as my own.
But I have asserted a firm conviction - a conviction rooted in my faith in God and my faith in the American people - that working together we can move beyond some of our old racial wounds, and that in fact we have no choice if we are to continue on the path of a more perfect union.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수년째 인종적 교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단 한 번의 선거와 단 한 사람의 후보자, 특히나 저처럼 불완전한 후보자로 인해 우리가 인종 갈등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앙과 미국 국민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굳은 확신이 있습니다. 함께 노력한다면 오랜 인종적 상처를 딛고 나아갈 수 있으며, 보다 완전한 통합의 길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선 실상 그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입니다.
For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that path means embracing the burdens of our past without becoming victims of our past. It means continuing to insist on a full measure of justice in every aspect of American life. But it also means binding our particular grievances - for better health care, and better schools, and better jobs - to the larger aspirations of all Americans, the white woman struggling to break the glass ceiling, the white man whose been laid off, the immigrant trying to feed his family. And it means taking full responsibility for own lives - by demanding more from our fathers, and spending more time with our children, and reading to them, and teaching them that while they may face challenges and discrimination in their own lives, they must never succumb to despair or cynicism; they must always believe that they can write their own destiny.
미국 흑인들에게 있어, 통합으로 향하는 길은 과거의 제물이 되지 않으면서 과거의 짐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곧 미국인 삶의 모든 측면에서 정의를 실현할 온전한 조처들을 끊임없이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각자의 욕구, 이를테면 더 나은 건강보험, 더 좋은 학교와 직장 같은 개개인의 바람 모든 미국인, 그러니까 유리천장을 뚫고자 하는 백인 여성, 실직한 백인 남성,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이민자를 포함한 모든 미국인의 보다 큰 염원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이는 다시 우리가 각자의 삶에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함을 뜻합니다. 부모에게 더욱 헌신하고, 자녀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주면서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살면서 역경과 차별에 맞닥뜨리더라도 절대 절망하거나 냉소해서는 안 되며,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Ironically, this quintessentially American - and yes, conservative - notion of self-help found frequent expression in Reverend Wright´s sermons. But what my former pastor too often failed to understand is that embarking on a program of self-help also requires a belief that society can change.
The profound mistake of Rev. Wright´s sermons is not that he spoke about racism in our society. It´s that he spoke as if our society was static; as if no progress has been made; as if this country - a country that has made it possible for one of his own members to run for the highest office in the land and build a coalition of white and black, Latino and Asian, rich and poor, young and old - is still irrevocably bound to a tragic past. But what we know - what we have seen - is that America can change. That is the true genius of this nation. What we have already achieved gives us hope - the audacity to hope - for what we can and must achieve tomorrow.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전형적인 미국식, 그렇죠, 보수적인 자립 개념이 라이트 목사의 설교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과거 나의 담임목사였던 그가 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립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라이트 목사 설교의 심각한 문제점은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치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 점입니다. 마치 진보가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신자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백인, 흑인, 라틴계, 아시아인,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의 연대를 구축하고 있는데도 이 나라가 여전히 비극적인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게 잘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 미국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미 이루어낸 것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으며 이뤄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희망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줍니다.
In the white community, the path to a more perfect union means acknowledging that what ails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does not just exist in the minds of black people; that the legacy of discrimination - and current incidents of discrimination, while less overt than in the past - are real and must be addressed. Not just with words, but with deeds - by investing in our schools and our communities; by enforcing our civil rights laws and ensuring fairness in our criminal justice system; by providing this generation with ladders of opportunity that were unavailable for previous generations. It requires all Americans to realize that your dreams do not have to come at the expense of my dreams; that investing in the health, welfare and education of black and brown and white children will ultimately help all of America prosper.
보다 완전한 통합으로 이르는 길이 백인에겐, 흑인들을 괴롭히는 것이 단지 흑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유산이 아님을 깨닫는 걸 의미합니다. 과거만큼 노골적이진 않지만 차별이 분명 존재하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학교와 지역사회에 투자하고, 인권법을 강화하고, 사법시스템의 공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앞선 세대가 누리지 못한 기회의 사다리를 현 세대에게는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미국인이, 네가 꿈을 이룬다고 해서 내가 희생되는 건 아니며, 흑인, 갈색인, 백인 아이들을 위한 건강과 복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궁극적으로는 미국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질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In the end, then, what is called for is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than what all the world´s great religions demand - that we do unto others as we would have them do unto us. Let us be our brother´s keeper, scripture tells us. Let us be our sister´s keeper. Let us find that common stake we all have in one another, and let our politics reflect that spirit as well.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강조했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서에 씌어 있는 것처럼, 우리 형제의 파수꾼이 됩시다. 우리 자매의 파수꾼이 됩시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바람을 찾아서, 우리 정치가 그것을 반영하도록 합시다.
For we have a choice in this country. We can accept a politics that breeds division, and conflict, and cynicism. We can tackle race only as spectacle - as we did in the O.J. trial - or in the wake of tragedy, as we did in the aftermath of Katrina - or as fodder for the nightly news. We can play Rev. Wright´s sermons on every channel, every day and talk about them from now until the election, and make the only question in this campaign whether or not the American people think that I somehow believe or sympathize with his most offensive words. We can pounce on some gaffe by a Hillary supporter as evidence that she´s playing the race card, or we can speculate on whether white men will all flock to John McCain in the general election regardless of his policies.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과 갈등, 냉소주의를 키우는 정치를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O. J. 심슨 소송 때 그러했듯 인종문제를 단순히 구경거리로 다룰 수도 있고, 카트리나 참사 때 그랬던 것처럼 비극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심야 뉴스의 소재로 다룰 수도 있지요.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매일 모든 채널에서 방송할 수 있고, 지금부터 그에 관한 얘기만 하고, 이번 선거 캠페인의 쟁점을, 제가 라이트 목사의 설교를 신봉하거나 공감하는지 여부로 한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힐러리 상원의원 지지자의 실수를 걸고넘어지며, 힐러리 상원의원이 인종카드를 사용하고 있다고 맹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책과 무관하게 백인들이 모두 존 매케인에게로 결집할 거라고 억측을 할 수도 있습니다.
(O. J. Trial: 1994년 유명 미식축구선수 출신 영화배우인 O. J. Simpson이 이혼한 백인 여성과 그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형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민사재판에서는 유죄가 인정됐다. 체포과정에서 경찰차가 100km를 추격하는 장면이 매스컴에 보도됐으며,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돈과 권력, 스포츠 스타, 인종문제, 가정폭력, 언론의 광기가 한데 어우러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Katrina: 2005년 8월 말에 미국 남부를 강타한 대형 허리케인. 미시시피 제방의 보수가 지연되고 이것이 무너지면서 강물이 범람해,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저지대에 살고 있던 흑인 및 소수인종들이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미국 내에 인종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치부가 여실히 드러났다.)
We can do that.
But if we do, I can tell you that in the next election, we´ll be talking about some other distraction. And then another one. And then another one. And nothing will change. That is one option.
Or, at this moment, in this election, we can come together and say, “Not this time.”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crumbling schools that are stealing the future of black children and white children and Asian children and Hispanic children and Native American children. This time we want to reject the cynicism that tells us that these kids can´t learn; that those kids who don´t look like us are somebody else´s problem. The children of America are not those kids, they are our kids, and we will not let them fall behind in a 21st century economy. Not this time.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다음 선거에서는 다른 얘기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겁니다. 그 다음 선거에도, 그 다음에도 또 그러겠죠. 그러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한 가지 선택입니다.
그게 아니면, 바로 이 시점,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함께 나아가 ‘이번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흑인 어린이, 백인 어린이, 아시아인 어린이, 히스패닉 어린이, 그리고 인디언 원주민 어린이의 미래를 앗아가는 붕괴된 학교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이 아이들은 배울 능력이 없다’거나 ‘우리와 다르게 생긴 아이들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냉소주의를 거부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그들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아이들이 21세기 경제에서 뒤처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how the lines in the emergency room are filled with whites and blacks and Hispanics who do not have health care, who don´t have the power on their own to overcome the special interests in Washington, but who can take them on if we do it together.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shuttered mills that once provided a decent life for men and women of every race, and the homes for sale that once belonged to Americans from every religion, every region, every walk of life.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fact that the real problem is not that someone who doesn´t look like you might take your job; it´s that the corporation you work for will ship it overseas for nothing more than a profit.
이번에 우리는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이 건강보험에 들지 않았음에도 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겐 워싱턴을 장악한 특수 이해집단을 이겨낼 힘이 없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한때 모든 인종의 남녀에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도록 했던 제분소가 문을 닫은 까닭에 대해, 한때 각기 다른 종교와 지역, 계층의 미국인이 소유했으나 지금은 매물로 나와 있는 집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당신과 다르게 생긴 사람이 당신의 일자리를 가로채는 게 아니라, 당신이 일하는 회사가 오로지 이윤을 위해 해외로 옮겨갈 거라는 점임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This time we want to talk about the men and women of every color and creed who serve together, and fight together, and bleed together under the same proud flag. We want to talk about how to bring them home from a war that never should´ve been authorized and never should´ve been waged, and we want to talk about how we´ll show our patriotism by caring for them, and their families, and giving them the benefits they have earned.
이번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같은 깃발 아래서 함께 봉사하고, 싸우고, 피 흘리는 각기 다른 피부색과 종교를 가진 남녀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절대 승인되지 말았어야 했으며, 벌어지지 말아야 했던 전쟁으로부터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살피고, 그들이 벌어들인 이익을 그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우리의 애국심을 표현할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I would not be running for president if I didn´t believe with all my heart that this is what the vast majority of Americans want for this country. This union may never be perfect, but generation after generation has shown that it can always be perfected. And today, whenever I find myself feeling doubtful or cynical about this possibility, what gives me the most hope is the next generation - the young people whose attitudes and beliefs and openness to change have already made history in this election.
대다수 미국인이 이 나라를 위해 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라고 온 마음으로 믿지 않았다면, 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다수 미국인이 원하는 통합이 결코 완전하진 않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늘 완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가능성에 대해 미심쩍거나 냉소적인 느낌이 들 때마다, 제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건 다음 세대입니다. 변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신념과 열린 마음은 이미 이번 선거에서 새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There is one story in particularly that I´d like to leave you with today - a story I told when I had the great honor of speaking on Dr. King´s birthday at his home church, Ebenezer Baptist, in Atlanta.
There is a young, 23-year-old white woman named Ashley Baia who organized for our campaign in Florence, South Carolina. She had been working to organize a mostly African-American community since the beginning of this campaign, and one day she was at a roundtable discussion where everyone went around telling their story and why they were there.
오늘 특별히 여러분께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생일에 애틀랜타에 있는 그의 교회본당에서 연설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23세의 백인 여성이 있습니다. 이름은 애슐리 바이아.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플로렌스에서 우리의 선거운동을 위해 조직을 꾸렸습니다. 그녀는 선거 캠페인 초기부터 주로 흑인 공동체를 조직해왔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서 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그녀도 끼어 있었습니다.
And Ashley said that when she was 9 years old, her mother got cancer. And because she had to miss days of work, she was let go and lost her health care. They had to file for bankruptcy, and that´s when Ashley decided that she had to do something to help her mom.
She knew that food was one of their most expensive costs, and so Ashley convinced her mother that what she really liked and really wanted to eat more than anything else was mustard and relish sandwiches. Because that was the cheapest way to eat.
애슐리는 자신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며칠 결근을 했고, 결국 그로 인해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건강보험도 상실했지요. 애슐리 가족은 파산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애슐리는 그때 어머니를 돕기 위해 뭔가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생활비 중 식비가 가장 많이 든다는 걸 알았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은 것은 겨자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라고 거짓말했습니다. 당시 그게 가장 저렴하게 끼니를 때우는 방법이었거든요.
She did this for a year until her mom got better, and she told everyone at the roundtable that the reason she joined our campaign was so that she could help the millions of other children in the country who want and need to help their parents, too.
Now Ashley might have made a different choice. Perhaps somebody told her along the way that the source of her mother´s problems were blacks who were on welfare and too lazy to work, or Hispanics who were coming into the country illegally. But she didn´t. She sought out allies in her fight against injustice.
애슐리는 엄마의 병이 나을 때까지 1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는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거운동에 동참한 이유는 자신처럼 부모를 돕고 싶고, 또 도와야만 하는 수백만의 어린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애슐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혹자는 그녀에게, 네 엄마의 문제는 복지 혜택을 받으면서 일 안 하고 게으르게 사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불법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당함에 맞서 싸울 연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Anyway, Ashley finishes her story and then goes around the room and asks everyone else why they´re supporting the campaign. They all have different stories and reasons. Many bring up a specific issue. And finally they come to this elderly black man who´s been sitting there quietly the entire time. And Ashley asks him why he´s there. And he does not bring up a specific issue. He does not say health care or the economy. He does not say education or the war. He does not say that he was there because of Barack Obama. He simply says to everyone in the room, “I am here because of Ashley.”
애슐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는지 물어봅니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다른 사연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체적인 사안들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흑인 차례가 됐습니다. 애슐리가 이 흑인에게 물었습니다. 흑인은 구체적인 이슈를 들먹이지 않습니다. 건강보험이나 경제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이나 전쟁에 대한 얘기도 아닙니다. 버락 오바마 때문에 온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짧게, ‘나는 애슐리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I´m here because of Ashley.” By itself, that single moment of recognition between that young white girl and that old black man is not enough. It is not enough to give health care to the sick, or jobs to the jobless, or education to our children.
But it is where we start. It is where our union grows stronger. And as so many generations have come to realize over the course of the two-hundred and twenty one years since a band of patriots signed that document in Philadelphia, that is where the perfection begins.
‘나는 애슐리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 이 말만으로, 젊은 백인 여성과 나이든 흑인 남성 간의 그 짧은 인식의 순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주고,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통합을 더 강하게 성장시키는 지점이 바로 거기입니다. 한 무리의 애국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에 서명한 이래로 221년간 수많은 세대가 깨달았던 것처럼, 거기가 바로 완전한 통합의 출발점입니다.
소셜 댓글 연습입니다.*^^*